작가와의 만남 with 윤고은작가
- 나의 일상/번역이야기
- 2018. 8. 14. 22:06
문학번역원을 다니며 제일 좋았던 점 중의 하나는 번역하고 있는 작품의 작가와의 만남이 있다는 점이다.
한 학기 동안 단편 하나를 번역하고 마지막 수업에는 작가와 만나 번역을 하며 궁금했던 점, 작품에 대해 궁금한 점 등을 여쭤보고 토론을 나눈다.
단순한 독자였을 때는 신경도 안 쓰고 넘어갔을 부분이 번역가의 눈으로 봐야 하니 한 글자 한 글자 고민하고 분석하게 된다. 또 그래야만 정확한 번역이 나올 수 있기도 하고.
이번 학기에 번역한 작품은 윤고은 작가의 『양말들』이었다. 문학사상 12月호에 실린 단편으로 아직 책으로 나오진 않았고 곧 단편집 묶음으로 출간될 예정이라고 한다.
엄마는 여전히 내 영정사진 앞에 앉아 있었다. 퍼뜩 생각난 것처럼 또 한 번 엄마를 불러보았지만, 내 말은 여전히 어딘가로 새어나갔다. 허공에도 틈새가 있다는 것, 그게 종이에 칼집을 한번 낸 것처럼 얇지만 충분한 구멍이라는 것도 최근에서야 알게 된 것이다.
아무래도 모두가 믿고 있는 사망날짜보다 훨씬 앞서서 내가 죽은 건 아닐까 싶을 만큼, 내가 기억하지 못하는 동선도 꽤 있었다. 내가 잘 알지 못하는 일들이 나를 증명하고 나서기도 했다.
세상에는 단지 순서를 좀 바꾸는 것만으로 전혀 다른 표정이 되는 그런 이야기들이 더러 있는 것이다.
엄밀히는 내 것이 아닌 고백이었는데, 언니에게서 어떤 감동 같은 걸 느꼈던 것이다. 설사 내 감정의 실제와 좀 온도차가 있는 고백이라 해도.
어떤 진실은 그런 오차 사이에서만 피어날 수 있어서, 둔한 사람들에게는 단지 알아챌 시간이 좀 필요한 것이다. 외로운 사람들에게도 그런 시간이 필요하다. 언제 죽었는지, 왜 죽었는지를 알기 위해 복기하는 동안 내가 목격한 건 하나의 가능성이었다. 어쩌면 나도 누군가를 사랑했을지 모른다는, 그런 가능성 말이다.
Q: 왜 '양말'인가요?
A: 일단 제가 좋아하는 단어에요. 발음도 맘에 들고요. (작가님은 발음을 중요시하신다고 했다.)
그 외에 제게 '양말'이라는 존재는 부피는 작지만 체온을 보호해주는 일종의 생존도구라고 느껴져요.
그리고 만약 길을 걷다가 땅에 양말이 떨어져있는 걸 봤다면 모두들 의아해할 거에요. 떨어져 있는 양말에 분명 어떤 사연이 있겠구나 생각하겠죠.
Q: "내가 강릉에 가서 진짜 해지하고 싶었던 건 그런 나의 무탈함이었다." 여기서 무탈함은 어떤 무탈함을 말하는 건가요?
A: 사람에 대한 무탈함을 말해요. 적당한 관계의 무탈함. 내가 적당히 사랑했구나. 내가 사랑 때문에 상처받지 않은 건 다행이지만 어느 순간 씁쓸해지는 거죠. 난 상처받을 만큼의 열정적인 사랑을 못해봤는데. 통제하지 못하는 사랑의 감정을 느끼고 싶은 마음인 거에요.
Q: "실체보다 더 큰 그림자"는 무얼 의미하나요?
A: 실체와는 상관없이 본래가 가지고 있는 것보다 더 큰 의미를 부여하고 싶은 마음을 뜻해요.
Q: "그건 신축성이 아주 좋아서 나 하나쯤 꿀꺽 삼킬 수 있는 양말 같은 것이다." 이 문장에서 신축성과 꿀꺽 삼킨다는 표현을 통해 어떤 걸 말하고자 했나요?
A: 양말은 일종의 나를 품어줄 수 있는 세계에요. 나를 보호해 주는 동시에 내가 어떤 문제를 직시하지 않고 그 속에 숨어버릴 수 있는 공간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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