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을 대하는 이상적 자세 (알쓸신잡+김영하 작가)

 

TV를 즐겨보는 편은 아니지만 요새 꼭 찾아보는 프로그램, 알쓸신잡

 

 

나영석 PD가 tvN에서 새롭게 연출한 예능프로그램이다. 프로그램명 알쓸신잡은 '아두면 데없는 비한 학사전'의 줄임말이다.

 

출연자는 가수 유희열, 작가 유시민, 맛칼럼리스트 황교익, 소설가 김영하, 물리학자 정재승.

 

각 분야를 대표하는 잡학 박사들이 제목명 대로 딱히 쓸 데는 없는 이야기지만 신비한 것들로 수다를 떨며 국내 여행을 함께 한다. 나영석 PD는 알쓸신잡이 뇌가 즐거워지는 프로그램이 될 것이라도 이야기했는데, 실제로 시청자들의 지적 유희를 만족시켜주고 있다.

 

총 8회분으로 기획된 프로그램은 1회 연장해 9회로 마무리한다고 한다. 지금 6회까지 방영됐는데 3회 남았다고 생각하니 벌써부터 아쉽다.


출연진 5명의 쓸데없는, 그리고 밑도 끝도 없는 방향으로 새는 이야기를 듣고 있노라면 금새 프로그램이 끝나버린다. 내용이 진중하지만 결코 답답하지 않고 항상 생각할 거리들을 던져준다. 가볍지도 무겁지도 않으면서 시청자들이 웃다가 이내 고민하게 만드는 정말 유익한 예능프로그램이다.

 

프로그램에 대한 설명은 여기까지 해두고, 며칠 전(7일)에 방영된 6회 공주편을 보는데 김영하 작가의 말에 손바닥을 치며 공감을 한 내용이 있어 나의 글로 정리하게 되었다.

 



글을 쓰기에 앞서 포스팅 제목 선정에 고민을 했다.

 

처음에는 '문학을 대하는 올바른 태도'라고 적었다. 적고 보니 문득 드는 생각은 '올바르다'라는게 과연 존재할까?였다. 우리가 옳고 그르다를 함부로 혹은 독단적으로 정의내릴 수 있을까. 물론 개인의 신념에 따라 정의할 순 있겠지만, 절대적이라고 믿었던 진리도 시대에 따라 바뀌기 때문에 조금 신중할 필요가 있다고 느껴졌다.

 

그렇다면 어떤 단어로 대체하는 게 좋을까 생각을 하다가 떠오른 단어가 '이상적이다'였다. '이상적'의 사전적인 의미는 '생각할 수 있는 범위 안에서 가장 완전하다고 여겨지는 것'이다.


사전적 의미를 보고나니 확실히 '올바른' 보다는 '이상적'이라는 단어 선택이 낫겠구나 싶어 '올바른'에서 '이상적'으로 수정했다.



그리고 '태도'와 '자세'의 정의도 찾아봤다.

 

(네이버 국어사전 참고)

 

'태도'와 '자세'에 나온 첫 번째 정의는 둘다 '몸 동작'을, 두 번째 정의는 '마음가짐'을 의미한다.

 

'태도'에서의 마음가짐은 '자세'보다 더 실제적 행동과 밀접해 보인다. 내가 원하는 관념적인 느낌을 내고자 두 단어 중 '자세'를 골랐다.


사실 둘 사이에 명확한 차이가 눈에 띄지 않아 어떤 것이 더 적합한 표현인지는 모르겠다. 단순히 내 느낌대로 선택했을 뿐이다. 혹시 개인이 갖고 있는 저 두 단어의 느낌적 차이에 대해 공유하고 싶은 사람이 있다면 언제든 환영이다.

 

 


 

다시 본론으로 돌아와서, 잡학 박사들은 저녁 식사를 하며 교과서에 대한 수다를 떨었다. 그러다가 김영하 작가가 몇 년 전 교과서에 자신의 작품이 실리는 것을 반대한 일화로 화두가 옮겨졌다.

 

 

 

김영하 작가의 설명은 이랬다.

 

단편 소설은 잘라서 실으면 안돼요. 처음부터 끝까지 보도록 쓴 작품이 단편 소설이에요.

해외의 경우 단편 전체를 읽고 토론하거나 에세이를 쓰게 하는 교육 방식이에요.

하지만 우리나라의 경우 한두 단락만 잘라내어 교육을 해요. 이게 문제에요.

 

문학의 본 의미를 성찰할 수 있게 해 준 수다였다. 그리고 그 의미를 존중하면서 나아가야하는 교육의 방향성도 고민하게 하였다. 

 

 

 

 

또 다른 문제는 답을 찾게 하는 거예요.

문학이라는 것은 자기만의 답을 찾기 위해서 보는 거지, 작가가 숨겨놓은 주제를 찾는 보물찾기가 아니에요.

 

 

 

 

작가는 '주제를 찾아봐라~'하고 숨겨놓지 않아요. 주제를 숨겨놓고 독자들과 그런 게임을 벌이지 않아요.

독자들이 다양한 감정을 느끼도록, 그리고 그 과정을 통해서 자기감정을 발견하고 타인을 잘 이해하도록 하는 거예요.

그래서 다양한 감수성을 개발하는데 문학작품이 쓰여야 하는데, 조각난 내용 속에서 단순히 답을 찾는 방식으로 가서는 안 된다.

 

김영하 작가가 말하는 이상적인 교육방식은 에세이를 쓰게 하는 것이다. 에세이라고 해서 거창한 글이라 생각할 필요가 전혀 없다. 여기서 잠깐, 에세이의 정의를 잠깐 찾아봤다.

 

(네이버 지식백과 참고)

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1530518&cid=41799&categoryId=41800

 

개인의 생각을 자유롭게 표현한 글이 바로 에세이다. 특별히 지켜야 할 양식이나 형태가 없다. 즉, 자기 감상이 논리적으로 말만 되게 하면 된다는 김영하 작가의 말처럼 자유롭게 (어떤 틀에 구애 받지 않고) 내 생각을 내 마음대로 풀어 쓰면 되는 것이다.

 

내가 쓰고 있는 에세이라고 하면 일기나 블로그 포스팅 정도가 되겠다. 참고로 각각의 에세이마다 선택하는 어휘나 글 스타일을 포함해서 글의 특징이 조금씩 달라질 수는 있겠다. 그래서 모든 문학형식 가운데 가장 유연하고 융통성있는 것 중에 하나라고 보는 것이다.


이런 에세이를 쓰다 보면 자기 감정을 들여다보고 타인을 이해하고 나만의 생각으로 정리할 수 있게 된다. 물론 모든 감정을 일일이 글로 표현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우리가 느끼는 감정에 비해 단어의 수는 극히 제한적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조금씩 글로 적다 보면 우리가 사용하는 어휘와 사고의 폭이 확장될 것이라고 생각한다. 

 

 

 

어떤 의미에서 문학작품은 우리 모두가 다 다르다는 것을 알기 위해서 존재하는 건지도 몰라요.

 

똑같은 작품을 읽어도 천명의 사람이 읽으면 감상도 천 개가 나와야 된다고 말하는 작가. 그렇게 다름이 정상이라고 말하고 있다.

 

나 역시도 내가 감명 깊게 읽은 책들을 지인에게 추천해주고 선물해주는 것을 좋아한다. 사실 문학작품 번역을 하고 싶은 이유도 이 연장선상에 있다. 내가 느낀 감동을 다른 사람도 함께 느끼기를, 그리고 그 감정을 공유하고 싶어서다. 


책 선물을 하다 보면 그 과정에서 상대방의 후기를 듣는 재미도 쏠쏠하다. 단 한 번도 나와 같은 생각을 한 사람을 본 적이 없으니까, 저마다 자신이 가진 스타일대로 작품을 해석하고 바라본다. 그래서 문학 작품이 즐거운 것이다.

 

김영하 작가도 말하고 있다. 그런 다양항의 세계를 받아들이기 위해 문학이 존재하는 거라고.

 

하지만 우리나라 교육과정은 나만의 방식대로, 순수한 내 주관대로 문학을 받아들이기 어려운 구조인 건 사실이다. 뭐든 정해진 정답과 그 정답만이 진리라고 가르치는 교육이다.

 

나도 성인이 되어서야 비로소 내 마음대로 읽고 해석하는 재미를 알게 되어 문학에 대한 인식을 바꿀 수 있었다.

 

내 학창시절을 떠올리면 (대학교 시절 포함) 문학 읽는 행위가 즐겁다고 느꼈던 적이 한 번도 없었다. '문학 〓 암기'라는 인식만 강했을 뿐이다. 이 부분은 지금의 학생들도 모두 공감할 것이다.

 

언제쯤 기존 교육방식이 좀 더 유연하게 바뀔지는 모르겠지만, 교과서가 사회 시대상에 맞게 변화했던 지난 날의 과정처럼 교육 방식도 그렇게 천천히, 하지만 더 효율적인 방식으로 바뀌어야 할 것이다. 그리고 그럴 수 있을 거라 믿는다.

 

 

 

소설이라는 것은 감정의 테마파크다.

 

김영하 작가가 한 소설의 정의이다.

 

평범한 일상 생활로만으로는 우리가 느끼는 감정이 제한적일 수 있다고 생각한다. 내게 닥친 상황을 내가 경험해 온 수준 안에서 느끼는 것 같다. 소설은 테마와 상황들이 무궁무진하다. 그 속에서는 우리가 평소 느끼는 것 이상의 감정들을 느낄 수 있다. 감정의 스펙트럼이 넓을 수 밖에, 정확히 말해서는 넓어질 수 밖에 없다.

 

이러한 소설의 특징이 우리의 사고를 한층 확장시켜 준다.

 




이전 회에서 김영하 작가는 책에 대해서 이렇게 말했다.

 

책은요. 읽을 책을 사는 게 아니고 산 책 중에 읽는 거예요.

 

읽고 싶어 샀던 책들. 책이 쌓여가는 속도에 비해 읽은 책이 늘어가는 속도는 아주 느리다. 자책하고 있는 나에게 큰 위로를 주는 김영하 작가의 말. 그래, 저게 정답이지! 나만 그런 거 아니야. 내 합리화에 정당성을 부여해줬다.

 

아, 그리고 김영하 작가도 여러 번 도전했지만 아직 토지를 읽지 않았다는 말에 한층 더 두터운 위로를 받았다. '20대에 꼭 읽어야 할 책'과 같은 홍보문구에 괜한 강박관념에 사로잡혀 산 책들이 몇 권 있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김영하 작가가 교과서에 본인의 작품을 빼달라고 요구하며 올린 글을 첨부하며 포스팅을 마무리해보려고 한다.



교과서에 실리지 않을 권리는 없는가?


 

지난 4월 27일, 창비의 저작권 담당자라는 분으로부터 이메일이 한 통 날아옵니다. 창비가 편찬한 2010학년도 중학교 1학년 2학기 교과서에 저의 산문의 일부가 수록되었다는 것, 교과서 수록은 저작권법 제 25조에 따라 학교교육의 목적으로 사용 시 저작권자의 허가를 받지 않아도 사용이 가능하며 추후 문광부가 정한 교과서 사용에 따른 보상금을 지급받게 된다는 것, 그런데 자습서와 참고서는 교과서와는 달리 저작권자의 게재 허락을 받도록 되어있으니 허락을 구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이 이메일은 저로 하여금 몇 가지 중요한 의문을 품게 만들었습니다.


첫째, 저작권법 25조는 정말 교과서 편찬자들이 저작권자의 허락없이 어떤 텍스트든 마음대로 갖다쓰도록 허용하고 있는가?


둘째, 만약 그럴 경우, 자신의 저작물을 교과서에 제공하기를 거부하는 저작권자의 자유는 어떻게 보호받을 수 있는가.


셋째, 국가는 과연 개인의 저작물을 마음대로 '징발'하고 '편집', 혹은 '수정'하여 사용할 수 있는가.


넷째, 교과서를 편찬하는 영리기업이 국가의 검정을 득한 교재를 출판한다는 이유만으로 저작권자의 동의 없이 저작물을 마음대로 갖다 사용할 수 있는가? 만약 그런 경우, 일본의 후소샤와 같은 극단적 정치의식을 가진 출판사가 악의적 목적으로 저작물을 짜깁기하여 엉뚱한 맥락에 저작물을 위치시켰을 때, 저작권자는 어떻게 자신의 명예를 지킬 수 있는가?


이러한 의문 하에 개정 저작권법 25조를 찾아 살펴보고 저작권 전문 변호사에게 문의해본 결과, 저작권자가 자신의 저작물이 국정이든 검정이든 교과서에 사용되는 것을 막을 수 있는 방법이 거의 없다는 것을 알 수 있었습니다. 단지, 저작권 전문 변호사 한 분의 견해에 따르면, 교육 목적으로 저작재산권을 제한하는 25조가 과연 수록을 거부하는 저작권자의 인격적 권리까지 제한하는지는 다퉈볼만한 문제라고 하였습니다. 즉, 이 부분에 대한 법률적 판단에는 모호한 부분이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이 저작권법 25조의 정신은 국가가 교육을 위해 필요한 교재를 만들 때, 저작권 사용료에 부담을 느끼지 않고 비교적 저렴한 비용으로 교재를 만들어 학생들에게 제공할 수 있도록 저작권자의 권리를 일부 제한하기 위한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저작물에도 분명 공공재적인 성격이 있으므로 이를 반대하지는 않습니다. 저작권법은 저작권을 보호하기 위한 법이기도 하지만 저작물을 사회 구성원들이 잘 사용하도록 촉진하기 위한 법이기도 하다는 것을 저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저작권자가 아예 수록 자체를 반대하는 경우는 어떻게 할까요?


저는 국어교과서에 제 글이 실리는 것에 반대합니다. 거기에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국어교과서들은 시를 제외하고는 원문을 그대로 싣는 법이 거의 없습니다.  작가가 추구했던 내적 완결성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문학은 문장으로 환원되거나 교과서 '저자'들의 맥락 속으로 폭력적으로 편입되고 맙니다. 그리고 그것을 바탕으로 문제집과 자습서가 만들어지고 결국은 입시 교육의 한 도구가 되고 맙니다. 우리나라의 교육 현실에서 교과서에 실린다는 것은 난도질 당한다는 것, 문제집의 지문이 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시험에 나올 것이고 출제자는 작품의 주제와 작가의 의도를 물을 테고 학생들이 이 문학작품을 얼마나 '이해'했는지를 점수로 측정할 것입니다. 문학은 정확하게 이해받으라고 씌어지는 것이 아니라 인생과 세계의 모호함을 대변하기 위해 씌어지는 것이라고 저는 믿고 있습니다. 오직 문학만이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계가 아이러니와 도덕적 딜레마로 가득찬 불투명한 회색지대라는 것을 자신의 몸으로 증언합니다. 그러나 교과서는, 태생적으로 짜깁기 앤솔로지이며 정답을 추구할 수밖에 없는 이 이상한 책은 그런 역할을 맡을 수가 없습니다. 그것은 오직 독자가 작품의 원문을 자유로운 정신으로 읽을 때, 개개 독자의 마음 속에서 조용히 일어나는 변화일 뿐, 시험의 점수로 평가받을 수 있는 성질이 아닌 것입니다. 이런 이유로 저는 제 글이 교과서에 실리는 것을 반대합니다. 저는 제 글이 그 글을 읽기 원하는 누군가의 자유의지로 선택되어 그의 골방에서 읽히기를 원합니다.


그러나 저의 이런 소박한 신념은 현행법 체계에서는 지켜질 수가 없다고 합니다. 국가는, 그리고 국가 검정 체계를 통과한 출판사는 마치 전시동원물자를 징발하듯 마음대로 저작물을 가져다 쓸 수 있습니다. 저는 이 부분을 이해할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창비의 교과서 사업을 담당하신 분과 만나 이 문제를 상의하였습니다. 교과서 사업에 처음 진출하는 출판사의 어려움과 미숙함에 대한 소상한 설명하시고 진작에 저작권자에게 알리고 허락을 구하지 않은 점에 대해 사과하셨습니다. 그리고 교과서에 글을 싣지 않겠다는 저의 뜻을 존중하여 2011학년도 교과서에서는 제 글을 뺄 수 있도록 교과서 편찬자들과 협의하겠다고 약속을 하셨습니다. 그러나 이미 인쇄되어 지방으로 배송까지 마친 2학기 교과서를 회수하여 폐기하는 것은 어렵다고 하시더군요. 책을 내는 사람의 한 명으로서 이미 찍은 책을 회수하여 폐기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 알기 때문에 저는 제 원칙을 접고 그 부분은 양해를 하였습니다.


그러나 현행법의 개정은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위에서 말씀드린 바대로 검인정 체계에서는 특정 출판사가 자신들의 정치의식이나 미의식에 따라 얼마든지 문제가 있는 교과서를 저작권자들의 뜻에 반하여 제작할 수가 있습니다. 정부가 이것을 적절히 걸러낼 수 있을까요? 창비 담당자의 말씀에 따르면 저작권자들은 교과서 편찬안이 검정에 통과할 때까지는 자기 작품이 그 교과서에 수록돼 있는지조차 알 수가 없다고 합니다. 검정에 통과한 이후에야 알게 되고 그때는 이번 제 경우처럼 수정을 요구하기에는 너무 늦은 시점이 되는 것입니다.


이런 일을 겪으면서 저는 과연 국가가 교과서를 만드는 과정에 개입하는 것이 옳은가 같은 좀더 근본적인 고민을 하게 되었습니다. 이럴 바에는 차라리 교과서를 모든 출판사가 자유롭게 만들도록 하는 것이 좋지 않을까요? 저작물은 마음대로 갖다쓰고, 검정 통과까지는 안개에 가려져 있으며, 일단 통과하면 그 출판사는 문제집이나 자습서로 과점적인 이윤을 누리게 됩니다. 출판사들은 검정에 통과하기 위해 무리한 투자를 하게 되고 이를 회수하기 위해 결국은 부가적 수익을 추구하게 됩니다.


저의 의문은 계속됩니다. 문학 교육을 과연 국가가 주도하는 것이 옳은가요? 다른 대안은 없는 것인가요? 아니, 문학이라는 게 교육되어야하는 것인가요? 그게 가능하기는 한가요?


이번 창비의 사례는 교과서 업계에서 일어나는 일의 빙산의 일각일 것입니다. 이번 일을 겪는 동안 저는 블랙박스라는 출판사가 이미 몇 년전에 제 소설 "삼국지라는 이름의 천국"의 일부를 발췌하여 고등학교 문학 교과서에 실었다는 사실을 뒤늦게 알게 됐습니다. 이 교과서의 편찬자들은 소설의 제목조차 "호출"이라고 잘못 표기하여 전국의 일선 고등학교에 배포하였더군요. 이런 교과서도 버젓이 검정에 통과한 것을 볼 때, 과연 국가의 검정체계라는 것이 제대로 돌아가고 있는 것인지조차 의문스럽습니다.


이렇게 볼 때,  저작권법 25조의 지나치게 포괄적인 저작권 제한 조항은 분명 사회적인 공론화와 개정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저작권자가 자신의 양심에 따라 최소한의 거부를 할 수 있는 권리는 있어야 할 것입니다. 아울러 현행 국가 중심의 문학 교육 체계에도 근본적인 재검토가 이루어졌으면 합니다.


이제 저는 제 본업인 소설의 세계 속으로 돌아갑니다. 다시는 이런 일로 소중한 시간과 힘을 빼앗기고 싶지 않습니다만, 과연 그렇게 될른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읽어주신 모든 분들께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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