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인어 더빙시장 이모저모

 

스페인이랑 멕시코에서 살면서 "더빙시장의 규모"가 생각 보다 큰 걸 보고 깜짝 놀랐었다.

 

이 곳에선 대부분의 외국 드라마와 영화를 더빙해서 공급한다. 나로서는 이해가 잘 가지 않았다. 보통 영화를 보면 그 배우의 진짜 목소리가 궁금하지 않을까? 내 경우를 예로 들면, 베니의 목소리가 없는 드라마 셜록홈즈는 봐도 본 기분이 아니랄까. 히들이 목소리가 빠진 영화 토르도 상상할 수 없다.

 

더빙 시장이 워낙 크고 견고해서 항상 의문을 갖고 있었는데, 얼마 전 친구와 이 부분에 대해 이야기해 볼 기회가 생겼다.

 

내가 생각하는 이유는 두 가지였다.

 

첫째, 문맹률이 높아 더빙시장이 발달했다. (나라를 비하하는 게 아니라, 워낙 중남미는 빈부격차가 심하다 보니 저런 생각을 하게 되었다.)

 

둘째, '영어→스페인어'로 번역해 자막을 넣을 경우, 그 내용이 너무 길어져 보는 사람이 따라갈 수 없을 정도로 자막이 빨리 지나가게 돼서 더빙을 선호한다.

  (참고로 '스페인어→한국어'로 번역시, 원문보다 길이가 짧아지는 게 보통이다. 그 반대의 경우, 아주 길어진다.)

 

이에 내 친구는 다음과 같은 이유로 반박을 했다.

 

첫째, 더빙으로 나온 표현들이 외화물을 더 쉽게 이해할 수 있게 한다.

 

둘째, 언어를 배우고자 하는 의지가 없고 게으른 국민성 때문에 더빙을 선호한다.

 

 

과연, 어떤 답이 맞는 걸까? 이에 대한 궁금증을 해소 하기 위해 이번 포스팅을 작성하게 됐다.

 

친구의 말로는 멕시코가 훌륭한 더빙으로 다섯 손가락 안에 꼽는 나라라고 한다. 이것저것 관련 자료를 찾아보니 그건 사실이었다. 하지만 예전 더빙시장의 황금기(época dorada) 때와는 달리 지금은 박봉에 시달리고 있다고 한다. 멕시코 더빙시장에 대한 사실과 그 명성 (프로그램 제목: Verdad y Fama) 및 그들이 직면한 문제점에 관한 2014년 방영된 다큐멘터리를 소개한다. 

 

 

El Doblaje Mexicano, 멕시코 더빙산업

  

 

동영상의 내용을 요약해 보면 아래와 같다.

 

더빙은 자막이 너무 빨리 지나가 읽는 데 어려움을 겪는 사람들을 위해 만들어지기 시작했다. 주로 아이들과 글을 못 읽는 사람들을 위해서였다.

 

멕시코 억양은 중남미 국가들 중에서도 가장 중성적이라 라틴 아메리카 모든 나라 사람들이 이해하는 데 문제가 제일 적었다. 또한, 스페인어와 스페인어를 말하는 방식을 훼손하지 않으면서 외화물을 중남미 문화로 흡수하여 해석하였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의 공감을 불러 일으켰다. 이렇게 멕시코 성우들에 대한 명성은 높았다.

 

하지만, 성우전문회사 Audiomaster 3000를 멕시코 최대 방송사 Televisa가 매입하면서부터 성우들의 노동환경은 악화되기 시작했다. 몇 년이 지나도 임금 인상은커녕 동결된 상태로 지속되고, 노동착취가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적은 돈으로 성우를 구하고 싶어하는 배급사의 야박한 예산정책 때문에 칠레, 아르헨티나, 베네수엘라 등 멕시코에 비해 임금이 매우 낮은 '비전문가' 사람들을 성우로 쓰기 시작했다. 물을 흐려놨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것이다. 이러한 문제는 지금까지도 계속 되고 있다.

 

다른 나라와는 달리 멕시코 더빙이 특별히 훌륭한 이유는, 배우들이 곧 성우이기 때문이다. 외화 작품의 배우들의 연기 의도를 잘 파악하고 그것을 정확하게 번역해 표현을 하려면, 성우의 일을 하기엔 배우가 최적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 수록 아나운서나 캐스터들이 더빙시장에 뛰어들기 시작했다. 이에 멕시코 성우들은 아나운서들이 성우 일을 해선 안 된다 라거나 못 한다라는 이야기가 아니라, 성우는 연극의 요소가 가미된 일(trabajo histriónico)이기 때문에 그들이 하기엔 역량이 많이 부족하다고 주장한다.

 

 

한 성우가 생각하는 '좋은 더빙이란?'에 대한 답변이 정말 마음에 들어 공유해 본다.

 

- Un buen doblaje no se nota. 

- 더빙을 듣고 있는 지 눈치 채지 못한 다면, 그것은 좋은 더빙이다.

 

 

Doblaje Latino vs Español, 중남미 더빙 vs 스페인 더빙

 

같은 영화도 스페인식 더빙과 중남미식 더빙으로 나뉘어 개봉된다.

 

뮤지컬 애니메이션 영화 「겨울왕국 (Frozen)」 주제곡 'Let it go'도

스페인에서는 ♪ Suéltalo, suéltalo, no lo puedo ya retener

중남미에서는 ♪ Libre soy, libre soy, no puedo ocultarlo más 로 각각 다르게 더빙되고 있다.

 

 

동영상 크리에이터가 생각하는 두 가지 다른 버전의 더빙이 갖는 차이점은,

 

1. 지역차 (Localización, depende de raíces culturales)

 - 라틴 아메리카에서는 최대한 욕설 사용을 피하려고 한다. 반면, 스페인에서는 욕설 사용에 거리낌 없다.

 

2. 중성적 발음 (Acento neutro)

 - 스페인더빙은 '스페인' 스페인어 발음에 기준을 두지만, 중남미더빙은 발음이 매우 중성적이다.

 

3. 성우가 되는 법

 - 스페인에서는 유니버셜이나 워너브라더스와 같은 거대 영화사가 직접 더빙을 할 '배우'를 찾는데, 중남미에서는 영화 배급사가 성우를 구한다.

 - 그리고, 스페인에서는 성우가 되기 위해서는 대학교 관련 학과에서 공부를 해야 하지만, 중남미에서는 보통 연극/드라마 배우가 성우 일을 동시에 한다.

 

 

Títulos de América Latina y de España, 중남미와 스페인에서 개봉한 같은 영화, 다른 제목

 

영화 제목 또한 스페인에서 개봉했을 때랑 중남미에서 개봉했을 때랑 달라지는 걸 볼 수 있다. 이 부분에 대한 토론을 하는 재미있는 영상이다.

 

 

같은 스페인어를 사용함에도 불구하고 제목이 다르게 번역된다는 사실이 참 흥미로웠다. 이는 비단 스페인과 중남미에만 해당하는 이야기는 아니다.

 

예전에, '겨울왕국' 영화 제목의 각 나라 버전을 본 적이 있다. 미국에선 Frozen, 우리나라에선 겨울왕국, 중국에선 빙설대모험, 크로아티아에선 빛나는 왕국, 우크라이나에선 차가운 심장, 그리스에선 추위를 뚫고 위로 등등.

 

저렇게 다양하게 번역될 수 있다니. 알면 알 수록 재미있는 번역의 세계다. 어느 나라의 번역이 더 낫다고 단정지을 수는 없지만, 중요한 건 그 나라의 정서, 사회, 문화에 맞게 번역되고 있다는 점이다.

 

 

자막 vs 더빙

 

자막은 공간적, 시간적 제한 때문에 그 길이가 원문보다 줄어들 수밖에 없다고 한다. 사람들의 가독성을 고려해, 가능하면 짧은 길이로 명확한 의미 전달을 할 수 있는 단어들 위주로 번역이 이루어 진다. 그리고 그 외국어를 이해하며 자막을 읽는 관람객을 의식해, 대사들이 더빙 버전보다 더 원문에 충실한 경향이 있다.

 

반면, 더빙의 경우, 그 나라의 말로 녹음하기 때문에 문화적 거리감을 줄여줄 수 있다. 우리가 실생활에서 쓰는 구어체 위주로 우리의 정서에 맞게 문장을 만들기 때문이다.

 

더빙에 대해 근거 없는 거부감만 가득했었는데, 이렇게 더빙산업에 대해 좀 더 알고 나니 더빙이야 말로 그 나라의 문화를 대변해주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리고 더빙이나 자막이나 거기서 거기라고 생각했는데, 둘 사이에도 큰 차이점이 존재한다는 것이 새삼 새로웠다. 나도 조만간 한 번 우리말로 더빙된 영화를 봐야 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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